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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CPHN : Research in Community and Public Health Nurs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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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Res Community Public Health Nurs > Volume 37(2); 2026 > Article
Original Article
한국 간호사의 업무 범위 확립과 권리 확보의 역사:1969년 ‘부산진 보건소 주사 사건’을 중심으로
이해리1orcid, 최규진2orcid
A History of Korean Nurses’ Efforts to Define Their Scope of Practice and Secure Their Rights: Focusing on the 1969 ‘Busanjin Health Center Injection Incident’
Hae Ri Lee1orcid, Kyujin Choi2orcid
Research in Community and Public Health Nursing 2026;37(2):190-199.
DOI: https://doi.org/10.12799/rcphn.2025.01466
Published online: June 30, 2026

1인하대학교 간호대학 박사과정

2인하대학교 의과대학 부교수

1Ph.D. Student, College of Nursing, Inha University, Incheon, Korea

2Associate Professor, College of Medicine, Inha University, Incheon, Korea

Corresponding author Kyujin Choi College of Medicine, Inha University, 100 Inha-ro, Michuho-gu, Incheon 22212, Korea Tel: +82-32-860-9820, Fax: +82-32-885-8302, E-mail: medhum@inha.ac.kr
• Received: November 12, 2025   • Revised: April 17, 2026   • Accepted: April 21, 2026

Copyright © 2026 Korean Academy of Community Health Nursing

This is an Open Access article distributed under the terms of the Creative Commons Attribution NoDerivs License. (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nd/4.0) which allows readers to disseminate and reuse the article, as well as share and reuse the scientific material. It does not permit the creation of derivative works without specific permis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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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urpose
    This study examines how nurses’ scope of practice was constructed through legal and sociopolitical processes in Korea, focusing on the 1969 “Busanjin Health Center Injection Incident.”
  • Methods
    By examining court rulings, newspaper articles, healthcare and labor documents from the time, this research analyzes the background, sociopolitical context, and societal impact of the incident.
  • Results
    At the time, nurses’ injection practices were widely performed but not clearly defined within the ambiguous legal category of ‘assistance in medical treatment.’ The incident brought this ambiguity into public and legal dispute, making nurses’ scope of practice a visible issue. Nurses’ collective action, particularly the refusal to administer injections, functioned as a critical mechanism that prompted renewed deliberation and contributed to the reconstruction of nurses’ scope of practice.
  • Conclusion
    These findings suggest that nurses’ scope of practice, previously lacking clear legal definition, became socially visible through the incident and was subsequently reconstructed through practice and collective action. This case highlights that nurses’ scope of practice is not fixed by formal regulation but emerges through the interaction between practice and social context, with implications for understanding nurses’ scope of practice in the context of integrated care.
2024년 간호법이 제정되었다. 이 간호법은 지난 수십 년간 의료법 아래 간호사를 ‘의사의 지도 하에 진료 보조를 수행하는 인력’으로만 규정했던 제약을 넘어 독자적 법제를 갖추어 향후 간호사의 역할을 보다 명확히 하고 전문직으로서 법적•사회적 위상을 제고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 것으로 평가받는다[1]. 이러한 역사적 계기를 마련하기까지 지난한 과정이 있었음은 물론이다. 선행연구에 따르면, 간호의 법적 지위에 관한 논의는 197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이 시기를 전후로 간호를 둘러싼 전문직 위상과 간호사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담론도 활발히 전개되었다[2,3].
특히, 1960-1970년대는 국가 주도의 결핵관리사업 등이 본격화되며 지역사회 보건의 핵심 기관으로 보건소의 역할이 증대되었고, 이에 따라 간호원의 역할이 확대 및 변화되었다[4,5]. 그러나 보건의료인력이 충분히 확보되지 않은 상태에서 간호원들은 일반 행정보조, 약사업무 등 보건소 내의 부족한 인력을 대신하는 업무를 수행[5]하게 되며 간호 업무의 범위와 책임은 점차 모호해지는 양상을 보였다.
이처럼 모호했던 간호사의 업무 범위와 법적•사회적 지위가 구체적으로 어떤 과정을 거쳐 오늘날에 이르렀는지 제대로 정리한 연구는 찾아보기 어렵다. 간호사의 업무 범위와 법적 지위에 대해 역사적으로 접근한 연구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선행연구는 1980년대 이후, 특히 2000년대 들어 이루어진 논의를 중점적으로 다루었을 뿐 1970년대 나아가 그 이전에 이루어진 논의는 다루지 않고 있다[3,6,7]. 게다가 대부분 제도권 내에서의 입법 논의에 주목하고 있어 그 법적 논의의 근간이 된 사회정치적 맥락을 읽어내기엔 다소 한계가 있다[6]. 즉, 2000년 이전 간호사의 역할과 업무 범위 그리고 전문직으로서 법적•사회적 위상에 대한 사회적 논의를 살펴볼 수 있는 연구는 없다.
본 연구는 이러한 연구사적 공백을 메우기 위해 1969년 ‘부산진 보건소 주사 사건’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본 사건은 간호사의 관행적 업무가 어떤 과정을 통해 법적 정당성을 획득하고 재구성되었는지를 보여줄 뿐 아니라 간호계에 국한되지 않고 노동계, 여성 운동의 맥락에서도 언급되었다는 점에서 재조명될 가치가 있는 사건이다.
연구 설계
본 연구는 1969년 부산진 보건소의 간호원이었던 김 간호원이 의사의 지시에 따라 주사를 놓은 후 환자가 쇼크사하는 사건과 이로 인해 의료법 위반 및 업무상 과실치사 혐의로 기소된, 이른바 ‘부산진 보건소 주사 사건’의 배경과 사회적 파장을 살펴보기 위한 사적 연구방법을 적용한 역사연구이다.
연구 대상
본 연구는 1969년 발생한 ‘부산진 보건소 주사 사건’과 관련된 법적 문서를 주요 분석 대상으로 삼았다. 또한 이 사건은 법적 논쟁으로 그치지 않고 전국적인 규모의 집단행동으로 이어지며 커다란 사회적 파장을 일으켰던 만큼 당시의 논의를 확인할 수 있는 이차자료를 활용하였다.
구체적으로, 본 연구에서는 판결문 등의 일차자료와 주요 분석 대상인 법적 문서 외에도 사회적 논의 과정을 확인하기 위해 당시의 신문기사 등의 일차자료를 활용하였으며, 간호계는 물론 다른 보건의료계에 미친 영향을 확인하기 위해 대한간호협회 기관지인 『대한간호』를 비롯해 각종 보건의료계 자료를 검토하였다.
이러한 자료에 근거해, 간호원의 사회적 배경을 중심으로 해방 이후부터 본 사건이 일어나기까지의 시대적 맥락을 분석하였으며, 사건의 전개과정과 이로부터 파생된 사회적 파장을 시간 순으로 구성하였다. 이후 간호원의 업무 범위와 전문성에 대한 담론이 어떻게 형성되었고 아울러 이 사건이 간호계는 물론 한국 사회에서 갖는 역사는 의미는 무엇인지 고찰해보았다.
본 연구는 공개된 문헌 자료를 분석하는 역사연구로, 인간 대상자를 직접적으로 포함하지 않기 때문에 기관생명윤리위원회의 심의 대상에 포함되지 않는다.
연구결과

사건의 배경: 해방 이후부터 1960년대까지 간호사들의 상황

1945년 해방 이후 들어선 미군정에서 행정적으로 가장 큰 변화를 보인 곳은 보건의료 분야였다. 일제시대 경무국 산하 일개 위생과에 머물러 있던 보건행정 기구가 미군정 하에선 위생국-보건후생국-보건후생부로 거듭나며 15개국 47개과를 거느린 최대 행정기구가 된 것이다[8]. 미군정이 작성한 보고서에 따르면, 남한의 공중보건이 매우 열악해 각종 전염병과 질병이 미군의 건강을 위협할 정도였다[9]. 이에 따라 미군의 건강을 보호하기 위한 정책들이 필요했고, 전염병과 다른 질병들의 예방을 위해 보건 진료소의 개선 및 확대의 필요성이 제기되었고[9], 특히 간호 인력의 중요성이 강조되었는데, 의사직보다 비교적 단기간에, 새로운 교육 체계를 적용시켜 교육할 수 있는 보건 인력이었기 때문이다[10].
당시 한국 사회에서 간호원의 위상은 미군정 보고서에서 ‘하인에 불과한 존재’라고 평가될 만큼 낮았다[9]. 이런 상황에서 미군정에서 목표하는 의료 체계 구축을 위해서는 간호 개혁이 필연적이었는데, 이를 위해 간호 자문관 파견, 교육제도 개편, 간호 위원회 조직까지 다방면에 걸친 개혁 작업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의사 중심의 가부장적이고 수직적인 의료계에서 공중보건을 위한 간호 인력들이 능동적인 역할을 수행하길 바라는 것은 이상에 불과했다[10]. 당시 ‘낮은 학력’, ‘젊은 여성’이 갖는 사회적 한계와 더불어 정부조직의 잦은 개편, 간호과 인력의 반복적 인사 이동, 이들을 감독할 수 있는 간호 인력의 부재 등으로 인한 행정적 한계가 더해지면서 간호 발전은 어려움을 겪었다[11].
간호사에 대한 수요가 급격히 늘어나며, 사회적으로 간호 인력 문제가 급부상한 것은 박정희 정권 시기였다. 1962년 보건소법 개정과 함께 가족 계획 사업 등 국가 보건 사업이 경제발전의 토대로 간주됨에 따라 보건소의 역할과 이런 보건 정책을 실행할 인력인 간호 인력의 중요성이 더욱 커지게 된 것이다. 1967년에는 가족 계획을 담당할 요원들이 전국적으로 배치됐는데 직접 업무를 수행할 간호 인력이 부족해 사업 시행에 어려움을 겪었다[12]. 더불어 196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파독(派獨)을 비롯한 국내 간호원의 해외 진출은 간호 인력 부족 현상을 더욱 심화시켰다. 이런 상황은 간호원의 처우 문제를 촉발했다. 1966년 대한간호협회가 제출한 청원서를 보더라도, 간호 인력 수급의 필요성, 간호직 수당 및 위험수당 지급, 직급의 개선, 보건간호원의 대우 개선 등의 요구가 담겼다[13]. 하지만, 정부는 간호 인력 수급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간호원에 대한 처우개선보다는 1966년 7월 ‘의료보조원법 시행령’ 개정을 통해 간호보조원 제도 신설함으로써 간호원의 해외 진출로 인한 국내 인력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로 했다. 이렇게 신설된 간호보조원이 의료현장에 대량 투입됨에 따라 간호원들의 처우는 더욱 열악해질 수밖에 없었다[14].
간호보조원 투입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당시 서울 시내 의료기관에 근무하는 간호원을 살펴보면 간호원자격증을 소지한 유자격 간호원은 38%에 불과하며, 나머지는 모두 정식 간호 교육을 받지 않은 무자격 간호 인력으로 채워진 상태였다. 이에 대해 의료기관은 인력 부족을 이유로 들었지만, 실질적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당시의 임금을 보면 유자격 간호원이 평균 1만 5천원 안팎의 보수를, 무자격 간호 인력이 평균 5천원 안팎의 보수를 받은 것으로 확인된다[15]. 즉, 비용 절감 측면에서 무자격 간호 인력의 고용 현상이 심화된 것이다. 지역 사회에선 이러한 현상이 더욱 두드러져, 무자격 간호 인력에 대한 단속 요청이 1950년대부터 이어지고 있었다[16]. 이러한 상황에서 절차적 정당성까지 확보한 간호보조원이라는 대체 인력의 투입은 면허를 소지한 간호원의 지위를 더욱 불안정하게 했다[17].
경제 개발을 최우선에 둔 군사정권의 권위주의는 간호직의 전문성 형성 과정에 구조적 제약을 더했다. 가족 계획과 파독 사업에 투입할 간호 인력을 신속히 양성해야 한다는 정권의 요구와 간호 노동에 대한 사회의 낮은 인식이 더해지면서, 간호 전문성은 쉽게 대체 가능한 것으로 여겨졌다[17]. 심지어 당시 정부는 간호보조원 제도 신설에 그치지 않고, 무자격자에 대한 양성화 정책까지 검토했다[18]. 이는 당시 한국 사회가 간호 업무를 전문직의 고유한 영역으로 보기보다는 정규 교육과 상관없는 단순 노동에 불과한 것으로 인식하였음을 보여준다.
이와 같이 간호 노동이 낮게 평가되고 간호직의 직업적 위상이 낮게 인식되는 것은 의료계 밖이나 소규모 의원급에만 존재하는 문제가 아니었다. 대표적인 예로, 1968년에만 서울의대 부속병원에서 병원 인턴들에 의한 간호원 폭행 사건이 다섯 차례나 발생하였다. 이에 그해 12월, 서울의대 부속병원의 간호원 및 간호 학생 200여명은 병원 인턴들의 폭행 사건에 항의하여 파업하기에 이르렀다[19]. 비록 파업은 사흘만에 직장으로 복귀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으나, 간호원 처우 문제가 상당한 휘발성을 가진 문제임을 보여주었다.

‘부산진 보건소 주사 사건’의 전모

앞서 본 바와 같이, 1969년 무렵, 간호원들은 복합적이고 구조적인 문제에 직면해 있었다. 파독 정책은 간호 인력의 해외 유출을 초래하며 국내 인력 부족을 심화시켰다. 그럼에도 정부는 근본적인 제도 개선 없이 간호보조원 제도를 신설했고, 의료기관들은 무자격 간호원을 계속 채용했다. 이러한 대응은 간호직에 대한 낮은 사회적 인식을 더욱 고착화시켰다.
간호원들에게 탈출구가 보이지 않는 이런 악순환의 고리에 파열구를 낸 것이 바로 ‘부산진 보건소 주사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1969년 5월 23일 김 간호원이 스트렙토마이신 0.5g을 환아에게 주사한 이틀 뒤 5월 25일 해당 환아가 사망함에 따라, 업무상과실치사 및 의료법 위반행위로 기소된 사건으로[20], 그 시작은 2개월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69년 3월 27일, 4살 된 여아가 지속된 호흡곤란과 천식으로 부산진 보건소에 내원하였다. 검사 결과 환아는 폐결핵증으로 진단되어 스트렙토마이신과 아이나(Isoniazid)가 처방되었다. 이중 문제가 된 스트렙토마이신은 0.5g, 1주일에 2번 방문하여 주사를 맞도록 처방되었다. 이후 환아는 다섯 차례 방문하여 주사를 맞았고, 사건이 발생한 5월 23일에도 특별한 처방 변경 없이 보건소에서 스트렙토마이신 0.5g을 맞았다. 당일 환아의 처방을 담당한 주치의는 휴가 중으로 부재한 상황이었고, 다른 의사와 간호사들도 외부 일정으로 보건소에서 근무하는 인력은 김 간호원과 동료 간호원 한 명뿐이었다. 사건 당일 환아의 어머니는 환아의 컨디션이 저하되었다고 동료 간호원에게 말했으나, 김 간호원은 다른 환자 처치 중으로 이 사실에 대해 알지 못했다. 이후 김 간호원은 투약카드에 적힌 대로 주사했고 이후 환아의 어머니가 아이의 이상 현상을 동료 간호원에게 보고했다. 동료 간호원은 보건소에 의사가 없어 환자의 어머니에게 근처 병원에 내원하는 것을 권유하였다. 그러나 환아의 보호자는 약국에서 약을 사먹는 것에 그쳤고 환아의 상태가 심각해지자 부산시립병원을 거쳐 메리놀병원에 입원하였다. 하지만 주사를 맞은 지 50시간이 지난 시점에서 환아는 결국 사망했다[21]. 부산시립병원에서는 환아의 상태를 “결핵성 뇌막염”으로 추정했고, 메리놀 병원에서는 사인에 대해 직접사인이 “호흡중추마비”, 중간선행사인이 “바이루스성 뇌막염”, 선행사인이 “폐결핵”인 것으로 기술했다[22]. 그러나 7월 17일 돌연 검찰은 사인을 쇼크사로 보고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감정에 따라 약물중독 가능성을 제시하며 김 간호원을 구속하였다[23].
이 사건의 핵심 쟁점은 간호원의 주사 행위가 의료법(법률 제1690호, 1965.3.23. 일부개정) 제7조에서 규정한 ‘진료의 보조’행위에 해당하는지에 대한 여부였다. 당시 의료법 제7조에서는 “간호원은 상병자 또는 해산부의 요양상의 간호 또는 진료의 보조에 종사할 수 있다“고 규정했다. 하지만 이에 대해 검찰은 “의료법 제7조에서 규정한 간호원의 진료보조 행위는 ①주사기의 소독이나 ②약 또는 약물 준비 ③진료 행위에 필요한 의료기재준비등을 규정한 것이지 주사 행위까지를 포함한 것이 아니”며 의사의 입회가 없는 주사 행위는 불법이라고 해석하였다[24]. 대한간호협회 측은 이와 다른 견해를 내놓았다. “7조에 규제된 진료 보조행위는 주사를 포함한 것”이라며[25] 의사의 입회가 없는 주사 행위가 불법이 아니라는 입장이었다. 이에 대해 보건사회부는 “간호원이 의사의 장기 처방에 따라 투약하거나 주사할 수 있고, 주사행위 등으로 약물로 인한 부작용이 생겼을 경우 주사 행위 자체에 과실이 없는 한 법적인 책임이 없다”고 유권적 해석을 내렸다[23]. 하나의 법조문을 둔 분분한 해석들은 결국 간호원의 업무가 구체적으로 명시되어 있지 않아 발생한 것인 만큼[25], 간호원의 업무범위, 특히 ‘진료의 보조’에 해당하는 업무 범위를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는 사회적 논의로 이어졌다.
이러한 사회적 논의를 가장 적극적으로 이끈 것은 간호원들 자신이었다. 1969년 8월 5일, 부산시내 각 보건소의 간호원 20여명이 “의사 처방에 따라 주사를 놓은 간호부가 쇼크사고에 대한 법적 책임을 지는 것은 부당하다”며 의사의 입회 없는 주사 행위를 거부하기 시작했다[26]. 검찰이 김 간호원을 구속하는 데 적용한 의료법 해석대로 행동에 옮긴 것이기에 누구도 이들을 제재할 명분이 없었다. 일주일 후인 8월 12일 대한간호협회 부산지구 산하 5백여명의 간호원들도 함께 주사 거부 행위에 동참했다[27]. 이 같은 행위는 9월 1일 대한간호협회의 결정에 따라 전국으로 확산되었고[28], 서울의 경우 세브란스병원, 가톨릭 의대 부속병원, 우석대학 부속병원 등 종합병원의 1천여명의 간호원들이 참여하였다[27]. 사실상 파업에 가까운 집단행동이 지속되자 정부 당국은 한발 물러섰다. 9월 2일 오전, 검찰은 김 간호원을 보석금 3만원에 석방시켰고[29], 같은 날 오후 보건사회부는 “의사의 처방에 따라 간호원이 주사를 놓아주었을 때 간호원에겐 책임이 없다”는 유권해석을 대한간호협회에 정식 통고했다. 이에 간호원들은 현장으로 복귀했고 그렇게 본 사건은 일단락되는 듯했다[30].
그러나, 약 반년 후인 1970년 2월 23일 결심공판에서 검찰은 김 간호원에게 업무상과실치사 및 의료법위반으로 징역 1년 6개월을 구형했다. 검사 측은 “피고인이 의학적 지식이나 기술이 없으면서 의사의 입회 없이 의료행위를 했으므로 마땅히 처벌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변호인은 “국민의료법 7조에 ‘의사의 처방아래한다’고 규정한 것은 의사의 의료보조행위를 말한 것으로 주사를 놓은 간호원에게는 책임이 없다”고 반론하였으나 구형은 바뀌지 않았다[31]. 대한간호협회는 즉각 반발했다. 그리고 이에 대한 항의로 3월 3일부터 전국 6천여명의 간호원들이 주사 행위를 거부하는 ‘태업’에 돌입힐 것이라며 성명을 발표했다[32].
실제 1970년 3월 3일 오전 10시를 기해, 전국 6천여명의 간호원들이 주사 행위를 거부하는 집단행동에 들어갔다[33]. 대한간호협회는 집단행동을 강행하며 간호행위의 법적 보장과 김 간호원의 무죄 석방을 요구했다[32]. 다급했던 보건사회부는 보건소와 산하병원에서 근무하는 간호원들이 ‘태업’에 동조할 경우 직무 유기로 고발할 것이라고 엄포를 놓으면서도[34], 공판 후 의료법 개정 등을 포함한 문제점들을 개선하겠다며 유화책을 폈다[35].
흥미로운 점은 간호계뿐 아니라 여러 의료관계자들이 간호원들의 집단행동을 지지했다는 것이다. 대한병원협회장 김홍기는 김 간호원의 행위가 합법적이라고 인정하며 대한간호협회에 대한 지지입장을 표명했다[36]. 비록 주사 업무 하나를 거부했을 뿐이지만 그것 만으로도 의료현장이 마비된다는 것을 이미 경험했기 때문인지 병원에 근무하는 상당수 의사들도 간호원들의 집단행동을 감쌌다[24]. 심지어 스웨덴 아동구호연맹은 간호원들의 주사행위 거부로 결핵퇴치사업을 계속할 수 없다는 공개장을 보사부장관에게 전달하기도 했다[37]. 많은 보건의료 관련 예산이 해외원조에 의존하던 상황에서, 국립의료원 설립 등 한국의 보건의료에 상당한 기여를 한 스웨덴 소속 기구의 공개장이었던 만큼 한국 정부로서도 적지 않은 압박을 받았을 것이다. 게다가 이 사건이 김 간호원이 결핵퇴치사업의 일환으로 스트렙토마이신을 주사하다 일어난 것임을 감안하면 이는 명백히 한국 정부에 대한 항의 표시였다[4].
이와 같은 예상치 못한 사회적 압력 때문인지 원래 3월 5일로 예정되었던 판결공판은 3월 9일로 연기되었다. 또한 3월 6일에는 보건사회부장관이 대한간호협회 간부들과 긴급회담을 갖고 “간호원의 주사행위에 대한 명백한 법의 보장”이 이루어질 것이며 “의사의 처방에 따르는 주사행위에 과실이 없을 때에 발생하는 사고에 대한 면책 등 협회의 요구조건을 관철시켜주겠다”고 확약했다[38]. 이에 대한간호협회도 3월 6일 오후 5시부로 ‘태업’을 철회하고 “회원들에게 주사행위거부를 중지, 정상업무에 들도록 통고”했다[39].
1970년 3월 9일 오전 10시, 드디어 ‘부산진 보건소 주사 사건’의 판결공판이 열렸다. 재판부는 “질병에 큰 변동이 없고 의사의 별도 지시나 처방의 변경이 없었던 이상 간호원이 원래의 처방에 따라 주사를 놓는 것은 적법한 진료보조행위”라며 의료법위반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고, 업무상 과실치사 부분에 대해서도 증거불충분으로 무죄를 선고했다[40]. 검찰 측에서는 항소의 뜻을 밝혔으나, 어디까지나 업무상 과실치사에 대한 것이었고, 가장 큰 논란이 됐던 의료법위반 부분에 대해서는 항소 포기를 선언할 수밖에 없었다[41]. 약 4개월 뒤인 7월 24일에 열린 이 업무상 과실치사에 대한 항소심에서도 결국 재판부가 “주사로 인한 쇼크로 죽었다는 증거가 없다고 판시”하여 검찰의 항소를 기각함에 따라[42] ‘부산진 보건소 주사 사건’은 최종 무죄로 마무리되었다.

‘부산진 보건소 주사 사건’이 간호계에 미친 영향

본 사건 전까지 간호원의 주사 행위는 관례적으로만 이루어졌던 행위였으며 법적 지위를 가지지 못한 행위였다[25,43]. 그러나, 김 간호원에게 무죄 판결이 내려짐에 따라 간호원의 주사 행위가 합법적으로 진료 보조 행위에 해당됨을 인정받게 되는 전환점이 되었다.
대한간호협회는 협회지에 ‘김영자 회원 완전 무죄 판결’이라는 글을 실어 본 사건이 간호계에 미친 영향을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ㄱ. 전 국민이 간호원에 대한 개념과 존재를 새롭게 하였고, ㄴ. 주사행위가 불법이 아님을 알리는 동시에 완전 법적 보장을 받게 되었으며, ㄷ. 단결의 결과가 간호원들을 약한 존재라고 인식하여 왔던 일반사회에 통념을 뒤집어 놓은 좋은 본보기가 되었다.”[44]
대한간호협회의 정리는 과장된 것이 아니었다. 실제 사건 이후 다양한 변화의 움직임이 일어났다. 먼저, 보건사회부에서는 판결에 대해 긍정적인 입장을 보이며[45], 간호원의 업무 한계를 마련하기 위한 새로운 의료법 시행령 개정안을 마련했다. “①의사가 없는 경우 환자의 응급처치권을 간호원이 행사할 수 있고 ②의사지시에 따른 주사 또는 투약에 대한 책임은 지시한 의사가 책임지도록”하는 내용이었다[46]. 해당 개정안이 실제로 법제화되지는 않았으나[47], 간호원의 업무 범위 명확화와 정당성을 법적으로 재정비하기 위한 노력이 있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또한, 본 사건은 간호원들에게 공통의 문제의식을 제공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적극적으로 함께 나서야 한다는 각성을 주었다. 단결된 ‘태업’의 위력을 경험한 간호원들은 집단적인 행동을 통해 자신이 속한 병원 현장의 문제들을 제기하며 본격적인 권리 찾기에 나섰다. ‘부산진 보건소 주사 사건’이 가라 앉은 지 몇 개월 안 된 1970년 9월,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부속병원과 국립의료원의 간호원들은 처우개선을 내걸고 집단행동에 들어간 것이다. 그러나 간호협회의 입장은 '부산진보건소 주사 사건' 때와 달랐다. 그럼에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부속병원의 간호원 160여명과 국립의료원의 간호원 230여명이 기존 5급으로 분류되었던 직급을 4급으로 상향 조정할 것과, 각종 수당의 인상, 휴일 근무 수당 지급 등을 요구하며 파업을 예고했다[48,49].
이에 대해 병원 측에서는 관계부처와 대책을 협의하겠다는 의지를 보였고 이러한 과정을 통해 9월 24일 돌연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부속병원 수간호원들이 파업철회를 결정하기도 했다[50]. 그러나 대다수 간호원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25일 파업을 단행했다[50,51]. 9월 26일 전남의대 부속병원 간호원 30여명 또한 처우개선을 위해 전원 사표 결의를 하며[52], 다시 전국적인 집단행동으로 확대될 기미를 보이자, 보사부 장관은 간호원들의 “건의 사항을 최대한으로 반영시키겠다”는 적극적인 의사를 표명을 했고, 이에 간호원들은 파업을 철회했다[53].
그러나 파업 직후 국립의료원 간호과장이 인사 조치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상황은 다시 격화되었다. 간호원들은 이를 ‘보복적 인사 조치’로 간주하였고, 이에 대한 반발로 10월 3일 재파업에 돌입했다[54]. 당시 보건사회부장관은 인사 조치가 간호원들의 집단행동과는 관계없음을 강조하며 파업에 관련된 간호원들을 법에 따라 엄중 조치할 계획이라고 거듭 경고하였다[55]. 병원 내 징계위원회의 회부, 파면 등의 가능성이 거론되면서 사태는 점차 극단으로 치달았다[56]. 하지만 간호원들로서는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다. 결국 보건사회부가 간호원들의 처우개선을 약속함으로써 파업 87시간만에 정상화되었다. 실제 이후 보건사회부는 간호원들의 연이은 집단행동에 전국 간호원들에게 지급되는 각종 수당을 500% 인상하는 방안과 직급조정안을 마련하여 호봉을 조정하기로 하는 등 상당한 수준의 처우개선안을 공표했다[57].
지역사회에서도 간호원들의 처우개선을 위한 움직임이 이어졌다. 1970년 12월 15일, 전국 각 시•도의 보건소 간호원들은 인사권의 문제점, 낮은 보수와 더불어 대부분의 간호원들이 임시직에 불과함을 문제점으로 지적하며 이에 대한 개선을 촉구했다. 이들은 보사부에 구체적 타개 방안을 제시했는데, “①간호직 공석에 간호보조원을 채용하지 말 것 ②보건소 간호원 직급을 높이고 보건간호제를 실시할 것 ③보건소 간호원에게도 지역에 따라 2천원~1만5천원의 벽지수당을 지급할 것 ④보건소 간호직 수당을 현재 2천원에서 1만원으로 인상하고 도립병원간호원은 4천원, 의료보조원 7천원의 수당을 지급할 것” 등이었다[58].
물론 이러한 간호원들의 요구사항이 다 관철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부속병원에서 시작된 파업 이후 전국적으로 간호원들의 처우에 대한 요구가 이어졌고, 점차 이는 개선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59]. 더불어, 당시의 신문기사가 잘 정리했듯이, ‘부산진 보건소 주사 사건’을 시작으로 1970년말까지 이어진 간호원들의 집단행동이 “우리나라 의료행정의 허술함과 의료제도상의 잘못을 들춰”냈고, 심지어 이러한 문제가 “종래 의사와의 관계가 주종관계라는 영역을 벗어나지 못한 데에서 발생된” 것으로 “간호라는 독자적인 영역의 설치가 시급”하다는 인식까지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60].

‘부산진 보건소 주사 사건’의 사회적 파장

1969년 ‘부산진 보건소 주사 사건’ 이후 1970년말까지 이어진 간호원들의 집단행동은 당시 투쟁에 참여한 간호원들 대부분이 여성이었던 만큼 언론에서도 여성 근로 문제와 관련되어 언급되기도 했다. 1960-1970년대는 급격한 산업화 시기를 거치며, 여성 노동자들의 수가 급격하게 증가한 시기였다. 그들 중 일부는 야학, 선교활동 등을 통해 노동자로서의 의식을 형성하고, 차별적 사회 구조에 비판적인 시각을 갖기 시작했다[61].
이를 통해 여성 노동자들은 점차 전통적 성역할에 근거한 차별적 처우에서 벗어나 노동자로서의 주체성을 찾았다. 이러한 시기에 발생한 본 사건과 이후 이어진 간호원들의 집단행동에 대해 1970년 12월 12일 경향신문은 “70년은 근로 여성의 직업의식과 권리의식이 어느때보다 뚜렷이 사회표면에 드러난 해”[62]였다고 평가하며, 대한간호협회의 투쟁과 간호원들의 집단행동을 근로 여성 투쟁사의 “전환점”이자 “최초의 성공”이라고 기록했다[62]. 또한 1970년 12월 15일 동아일보에서도 사건에 대한 대한간호협회의 대응을 언급하며 다른 여성단체도 간호원들을 본받아 뚜렷한 목표 의식을 가지고 행동함으로써 자신들의 권리를 찾아야 한다고 촉구하였다[63].
본 사건의 핵심 쟁점은 결국 간호원의 업무 범위가 법적으로 명확하게 규정되지 않아 ‘진료의 보조’ 라는 개념으로부터 파생된 간호원의 ‘주사 행위’ 자체가 법적인 정당성을 가지고 있느냐에 대한 문제였다. 당시 간호원의 업무 범위는 의료법 안에서 존재했지만 이에 대한 구체적인 행위의 범위가 명확하게 정해져 있지 않은 상태였다. 이러한 모호한 상황 속에서 발생한 본 사건은 관행적으로 이루어졌던 업무가 법적, 사회적 논쟁의 대상으로 가시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최종적으로 법원에서의 무죄 판결은 간호원의 주사 행위에 대한 법적 정당성을 마련하였으며 이는 기존의 관행이 사후적으로 인정받은 사례이다. 즉, 이는 간호사의 업무 범위와 직업적 권위가 고정된 규정이 아니라 갈등과 사회적 논의, 집단적 행동을 통해 지속적으로 재구성될 수 있는 것임을 보여준다.
또한 본 사건에서 주목할 점은 간호원들의 전면적 파업이 아닌 문제가 되었던 주사 행위만의 거부를 통한 제한적인 집단행동이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전략 덕에 비교적 수월하게 도덕적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었고, 간호계뿐 아니라 다양한 의료관계자들의 지지를 받을 수 있었다. 더불어 주사 행위 자체가 당시 주요 사업이었던 결핵 사업에 영향을 끼쳤다는 점 등을 고려할 때 당시 정부에게도 상당한 부담을 주었을 것이다. 즉, 전국적 규모, 선택적 태업, 정치적 압박의 다발적인 영향을 발휘한 간호원들의 집단행동은 빠른 무죄판결과 광범위한 사회적 지지를 받아내며 효과적으로 마무리될 수 있었다.
나아가 본 사건은 간호원의 직업적 지위와 노동에 대한 문제를 공적 담론으로 부각시키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후 시대적 연속선상에서 간호원의 처우와 권리를 사회적으로 공론화하고 문제제기를 확대시켜 개선으로 나아가는 물꼬를 텄다. 물론 ‘부산진 보건소 주사 사건’의 집단 행동은 업무 범위와 직업적 권한이라는 전문직적 권리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는 점에서 주로 저임금과 생존권을 중심으로 한 1970년대 제조업 중심의 노동운동과 구별되는 측면이 있으나, 박정희 정권이 들어선 이후 일어난 가장 크고 앞선 것이었기에 그 자체로 노동운동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부산진 보건소 주사 사건’에 연대해 집행행동을 벌였던 바로 그 주체들이 얼마 지나지 않아 직급 조정, 수당 인상 등의 노동 조건 개선을 요구했다는 것이 이를 방증한다[58].
더불어 당시 언론에서 본 사건과 이후 간호원들의 집단 행동들에 대해 여성 노동 투쟁의 주요 성과로 언급했다는 점은 본 사건이 간호계 내부를 넘어 여성 노동의 권리 의식이 가시화되는 과정과도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간호원들의 집단행동이 단순한 직종 내부의 문제 제기를 넘어 여성 노동의 권리 담론 형성에 영향을 미쳤음을 시사한다.
다만, 본 연구는 특정 사건을 중심으로 한 연구로 연구 결과를 당시 간호계의 전체적 상황으로 일반화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더불어 1차 사료가 충분치 못하고 판결문, 당시 언론, 학술 자료 등을 통해 분석하였기 때문에 당시의 실제 환경을 구체적으로 고려하지 못했다. 아울러, 당시의 열악한 환경을 충분히 검토하고 건설적으로 회고해 나가는 작업이 아직은 부족하여 그로 인해 2차 사료 또한 많지 않아 본 연구 역시 사건의 재발견을 넘어선 깊은 분석까지 나아가지 못한 한계가 있다.
그러나 본 연구는 기존 연구들이 주로 입법 논의를 중심으로 간호사의 업무 범위를 다루었다는 것과 달리 역사적 사례를 통해 업무 범위가 형성되는 과정을 사회적 맥락 속에서 분석하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또한 본 연구가 제시한 사건의 역사적 의미를 바탕으로 향후 보다 많은 논의가 진행되며 그 가치가 더해질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더불어 현재 간호법이 제정되며 간호 인력의 업무 범위, 진료지원업무 수행 범위 등에 대한 세부적인 기준이 필요한 상황에서 본 사건은 법적으로 채워지지 않은 제도적 미비점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에 대한 의문을 해결할 수 있는 하나의 선례로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본 연구는 1969년 ‘부산진 보건소 주사 사건’을 중심으로 간호원의 업무 범위와 법적 지위의 형성 과정을 역사적 맥락 속에서 분석하였다. 간호원의 주사 행위는 당시 관행적으로만 수행되었으며 법적으로 규정되지 않은 상태였는데 본 사건을 계기로 이러한 모호성이 사회적으로 가시화되었다. 그리고 이후 법원에서의 무죄 판결을 통해 관행적 행위에 대한 법적 정당성을 부여 받는 과정을 이끌어내며 간호사의 업무 범위와 직업적 권위가 고정된 규정에서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공론화와 집단적 실천을 통해 바뀔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점은 오늘날 지역사회에서 통합 돌봄 등으로 간호사의 역할이 증대되는 상황에서 간호사의 역할과 업무 범위가 단순히 일방적으로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실제 현장에서의 역할 수행, 사회적 요구와 이를 위한 실천적 행동을 통해 지속적으로 재조정되고 재구성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Conflict of interest

The authors declared no conflict of interest.

Funding

None.

Authors’ contributions

Hae Ri Lee contributed to conceptualization, data curation, writing—original draft, and review & editing. Kyujin Choi contributed to conceptualization, data curation, writing—original draft, review & editing, and resources.

Data availability

Please contact the corresponding author for data availability.

Acknowledgements

None.

Figure & Data

References

    Citations

    Citations to this article as recorded b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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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 History of Korean Nurses’ Efforts to Define Their Scope of Practice and Secure Their Rights: Focusing on the 1969 ‘Busanjin Health Center Injection Incid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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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CPHN : Research in Community and Public Health Nurs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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